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군이 되어보세!/등장인물/2부 (문단 편집) ==== 기타 ==== * '''[[광해군]]'''★ 하성군의 차남. 아버지와 형과는 달리 책을 좋아하는 차분한 모범생 스타일. 주인공은 원역사 광해군의 세자 시절 행보를 생각해서 높게 평가하고 잘 대해준다. [[두창]]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상희가 완성한 종두를 맞고 회복하여 조선의 첫 종두 사용자가 되는데 그 후로 상희를 연모하게 된다. 하성군이 일본에 간 후 보내는 정보보고는 형식적으로는 광해군에게 보내는 편지로 되어 있기 때문에 광해군이 갖고 입궐해 주인공을 알현하는데, 이때 곁에 상희가 있으면 얼굴이 빨개지고 말을 더듬는다고 한다. 14살이 되어 어른들이 혼사를 추진하나 상희에 대한 짝사랑 때문에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하성군의 강력한 권유로 문성군부인 유씨와 일단 결혼했지만, 형이 순왜가 되면서 인생이 꼬였다. 주인공은 광해군을 좋아해서 연좌죄로 처벌하고 싶지 않기에 신립의 관을 운구하는 일을 맡긴 뒤 족친위로 참전시켜서 죄를 씻게 해준다. 그럼에도 광해군을 처벌하라는 여론이 심해서 부인 유씨와 함께 견서사로 파견하는데 광해군에게는 시야를 넓힐 기회가 되지만 광해군을 처벌하라는 선비들에게는 이것이 귀양으로 여겨졌기 때문. 견서사로 떠나면서 바닷길에서 임신을 하면 곤란하다는 이유로 유씨와 관계를 전혀 맺지 않는데 이 때문에 유씨와 관계가 크게 악화되어 결국 유럽 체류 도중 유씨와 이혼했고[* 이항복의 말을 보면 상희에 대한 짝사랑도 들킨 것 같다.] 상희에 대한 미련과 집안이 망한 것에 대한 허탈감으로 천주교에 귀의하여 신부가 된다. 3차 견서사와 재회했으나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교황청에서는 차기 조선교구 주교로 내정해둔 상태이다. 외전 5부에서 장조 승하 소식을 베네치아에 주재하던 한호에게 듣고 교황에게 추도미사를 요청하나 거부당하자 조선인들만 모여 조촐하게 사적으로 추도미사를 집전한다. 이때 유럽이 종두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남은 삶 동안 조선과 유럽 사이의 간격을 줄이는데 바치겠다고 다짐하며, 그 공로로 추기경까지 올랐으며 죽을 때까지 다시는 조선으로 오지 않았다고 한다.[br][br]3부에서 견서사로 파견 온 재석은 미술품들을 막 수집하는데, 그 중 [[루벤스]]가 그린 광해군 그림을 수집하게 된다. [[추기경]]이 된 광해군이 환갑이 지나서 한복을 입고 그리게 한 그림으로, 현실에서 [[한복 입은 남자]]를 대체하게 되었다.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원 역사와 달리 작중 역사에서는 '''최초의 조선 출신 추기경'''으로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두고두고 추앙 받을테고, 비신자들이라도 역사를 공부하며 기억하게 될 인물이 될테니 작품의 수혜자가 되었다. * '''[[https://en.wikipedia.org/wiki/Virginio_Orsini,_Duke_of_Bracciano|엔리코 오르시니]] 주교'''★ 교황 식스투스 5세가 세스페데스의 조선왕 사제왕설을 확인하기 위해 조선에 보낸 특사. 이탈리아의 명문가인 오르시니 가문 출신이다. [[프란치스코회]] 소속으로 조선 국왕이 [[예수회]]만을 받아들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예수회 신부들을 압박하기도 한다. 2차 견서사가 오자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 '''파견단장 로드리게스''' [[성 요한 기사단]] 단원. 교황 명령으로 조선에 3년 기한으로 선상백병전 고문관으로 파견되었다. 대외적인 명목은 교황 특사 호위. 최신화에서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 소식을 듣고 관심이 동해 페데리코 추기경에게 전선 참관을 부탁해 달라는 귓속말을 하고 이에 페데리코 추기경이 부탁을 하게 되고 마침 성 요한 기사단의 능력을 이용하고 싶었던[* 전투력은 조선 수군이 뒤지지 않지만 배울 것은 있을 것이고 결정적으로 이들이 조선 수군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한다면 서구 세계에 조선의 위상을 높여 외교 입지를 단단하게 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주인공의 오케이 사인으로 이순신과의 접점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정발과 함께 다니고 있으며[* 전쟁을 참관하러 온 참관단이라 이순신이 탐탁해하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수군에서 기사단과 소통이 가능한 건 세계일주 동안 스페인어를 배운 정발뿐이었던 것이 컸다.] 수전을 보고 싶어한다. 조선 수군이 어떻게 싸우는지 알아야 가르치든 배우든 할 수 있기 때문. 그리고 조선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라는 코르나로 추기경의 지시를 받고, 부산 교두보에서 벌어진 최후의 결전에서 조선 수군 등선군과 함께 등선군으로 참전한다. 경인왜란 종결 후 3년간 등선군을 훈련시키고 3년이 지나자 유럽으로 귀국하여 보복원정은 참가하지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